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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rhesia

'강정구 문제의 어떤 핵심'이라는 공감가는 글을 읽다.

우리는 '어떤 주장에 반대하는 일'과 '어떤 반대주장을 허용하는 일'에 대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후자를 흔히, 전자로 받아들인다. 강정구의 주장을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일이 강정구의 주장에 찬성하는 일과 동일시되는 건, 우리가 의견을 섬세하게 읽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강정구 발언은 반박되어야 하지, 재갈이 물려서는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금지와 억압은, 발언 속에 들어있을 수 있는 '오류'까지를 오히려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권력의 작동 기제에 대해 평생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온 미셀 푸코는 얼마 전 얇은 책 한권을 내놨다. '두려움 없는 발언(Fearless Speech)'라는 이 책은, 옛 그리스에 있었던 낱말 하나를 추적하고 있다. '파르헤시아'. 이 말의 의미는 바로 '두려움 없는 발언 환경'이라는 뜻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그리스에서 이 말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미셀 푸코는 사회에 드리워지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공기(空氣)를 읽어낸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예상되는 어떤 피해와 위험 때문에, 하고싶은 말을 삼키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가. 푸코의 관심은 거기에 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어릿광대나, 이 땅의 고전극에 나오는 말뚝이의 겁없는 '발언'은, 파르헤시아의 추억을 복기하는 '연극적인 자유공간'이다. 강정구 발언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의 '파르헤시아'를 생각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까.

Comments (4)

많은 걸 배웁니다. ^^

반성되는군요.

최근에 이 문제에 관해 제 홈에도 글을 한번 올려보고싶었지만, 야근생활에 바빠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가끔씩 들어오면서 인사도 못 남기고 갔습니다. 건강하시죠?
하여튼 조만간 즐거운 저녁밥상으로 만나뵙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

비슷한 예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에 나오는 내용중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이 문장이 너무 인상깊어 저의 메일 서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절대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