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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혹은 미국의 역사

Link to Aladdin : ISBN 8989305055학명이 ‘현자들의 과일’이라는 뜻의 ‘무사 사피엔툼(Musa sapientum)’인 바나나는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가 ‘인도의 현자들이 이 식물의 그늘아래 쉬면서 거기서 딴 과실을 먹더라’고 적은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근거로 붙인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아무나 먹을 수 없던 과일 중 하나가 바나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소득 증가로 인한 생활 향상, 관세 인하 등의 영향으로 희소가치성이 없어지자 사치 과일이라는 높던 지위를 잃고 차츰 우리 식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과일과는 달리 쉽게 복부 포만감을 불러 일으켜 비만의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는 오해를 받은 것도 이 과일이 빠른 시간안에 이국적인 매력을 상실한 요인이 된 것 같다.

이제는 눈여겨 찾지 않으면 관심 밖의 과일이지만 그 희한한 생김새로 인한 발칙한 상상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나나하면 원숭이와 남성의 성기를 연상할 것이다. 이국적인 과일이다 보니 낭만과 열대를 떠 올리게 될 것이고 그러한 생각은 가장 친근한 열대밀림의 아이콘이며 바나나를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어릴 적부터 매스컴을 통해 선행학습이 되어진 원숭이를 자연스럽게 연관시킨다. 그리고 저속한 생김새는 언급한대로 또 다른 생각을 하게한다.

낯선 사물이 어떤 세계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부여 받는 의미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익살맞고, 섹시하고, 저속하며, 낭만과 모험의 이국적인 열대과일’인 바나나에 대해서는 지역 사회내에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부여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의문을 풀어 줄 책이 이국적인 사치 품목으로 대접받다가 20세기초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로 변모한 ‘바나나’라는 과일을 통해 미국 문화에서 바나나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다양한 의미에 대해 기술한 ‘바나나, 혹은 미국의 역사’라는 책이다.

이 책과 함께 바나나가 미국에 소개되는 시점부터 최근까지 바나나와 관련된 문화 변천을 따라가다 보면 유나이티드 프루트나 스탠다드 프루트 같은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모습과 ‘바나나 전쟁’이라고 알려진 EU와의 무역마찰도 그 내막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바나나를 매개로한 미국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바나나잎의 환각효과에 대한 진실과 영화나 만화 등을 통해 많이 보아온, 밟으면 미끄러지는 바나나껍질에 담긴 시대를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거리에 버려진 다른 잡동사니도 하고 많은데, 왜 유독 바나나 껍질을 그토록 문제 삼았던 것일까? 바나나 껍질이 거리에 등장한 시기는 마침 미국의 도시마다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밀려들던 때였다. 늘어 가는 쓰레기 때문에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면서 바나나 껍질은 모든 잡동사니를 대신하는, 더 나아가 “이민 문제” 자체를 의미하는 코드명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p203)

거리에서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흔히 가난한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이민자들과 결부되었다. 대중앞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교양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p206)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우리가 수입하는 바나나의 원산지 중에 당연히 미국도 포함되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1999년 기준으로 1인당 75개의 바나나를 먹어 치우는 미국도 바나나의 전량이 수입되고 있다. 나에게 바나나는 ‘미국의 것’이 아니면서 가장 ‘미국적인 것’이 되어 버린 아이콘들 중의 하나였다.

사족 1 : 왜 바나나는 냉장 보관을 하면 안될까?

바나나는 냉장 상태로 수송되며 껍질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냉장하면 성숙속도가 더뎌져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바나나를 “절대로” 냉장고에 보관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대단히 성공한 마케팅이었다. 사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음에도, 구입한 바나나는 가능한 한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는 믿음이 주부들 사이에 확고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 캠페인이 놀랄 만큼 큰 성공을 거두면서 대중 잡지들에 식품 관련 글을 기고하는 필자들조차 같은 내용의 경고를 되풀이 했다. 이따금 반대로 충고하는 사라도 없지 않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줄곧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절대로 안 된다는 믿음을 고수했다. (p109)

사족 2 : 바나나하면 생각나는 우리 막내놈 이야기